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은은한 이야기

새벽

목련이 필때 2021. 2. 10. 05:54

어서오세요..반갑습니다..은은한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새벽을 좋아했다. 박꽃이 하얗게 피는 황혼도 사랑스럽지마는 희끄무레 동터오는  새벽녘이 훨씬 반가웠다.

봄의 새벽은 포근해서 좋고, 여름의 새벽은 신선 해서 좋고, 가을의 새벽은 싸늘해서 좋고, 눈떠보면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의 새벽은 창자 속까지 스며드는 신선한 가운데 정신이 바짝 들어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어쩌다가 늦잠이 들어 새벽시간을 즐기지 못한 날은 머릿속에서 연기라도 낀 듯이 종일 찌뿌듯한 게 심신이 개운하지 못하여서 일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곤 하였다.

그래서 왕년에는 상록수의 모란, 작약, 침정 화가 덮인 석가산이랑, 수련이 동동 뜨고 금붕어가 늠실대는 연못이랑도 만들어 제법 정원답게 꾸며서는 새벽 산책의 시간을 좀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작은집으로 옮기게 되면서는 정원이란 것도 없이 좁으나마 뜰 전체에 잔디를 묻고 가을 향나무, 전나무, 라일락, 사철나무, 단풍나무 등을 심었더니 잔디는 퍼지고 나무들은 자라서 아쉬운 대로 새벽의 분위기를 살벌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더구나 새벽에 이슬을 퉁기며 뛰는 메뚜기를 잡아 보는 재미는 기막혔다.




 

 

 




전해에 알이 통통 밴 메뚜기 한 마리를 구해다가 잔디밭에 놓아두고 새벽마다 그것이 어디 선건 건각으로 뛰고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찬바람이 살랑대는 가을이 되었는데 이제는 메뚜기의 안위가 걱정스러워졌다.

날마다 잔디의 색깔은 변해가고 메뚜기의 동작은  무디어져서 차라리 여치집을 만들 어그 속에서 겨울은 나게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하루 새벽에는 메뚜기가 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일을 그르치지나 않았나 하고 잔디 폭마다를 뒤집다시피 지성껏 찾으니까 으슥한 곳에 누르스름한 메뚜기의 허물만이 남아있어서 애처롭게 여기고 말았는데, 다음 해 봄에 금잔디에서 속잎이 나 그것이 파랗게 자람과 함께 잔새우보다도 더 작은 메뚜기 새끼들이 수없이 아물대며 톡톡 튀어나왔다. 나는 새벽마다 요것들이 커가는 것을 지켰다.

참으로 오이 붓듯 가지 붓듯 무럭무럭 자라 하루 세 번 몰라볼 만큼 굵직해갔다. 우리의 하루가 그네들의 두해나 되는가 싶게 큼직하고 묵직한 것들은 제법 파르르 날기까지 하였다. 이러노라니 나의 새벽은 언제나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오래 계속할 수 없이 흉악한  두꺼비란 놈의 침해로 가냘픈 메뚜기들은 날마다 희생되어 가고 그중에서 크고 날쌔고 용감한 몇 마리만이 남아 나를 슬프게 하였는데 나중에는 그 잔디밭마저 없어져 나를 깊은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으나,

그 후로도 나는 더욱 좁아진 내 뜰에나마 돌아가며  일 년 초의 화단을 만들어서 새벽이면 고운 화초와 더불어  과히 쓸쓸하지 않은 시간을 만들어서 보내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느 철의 새벽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한가하고 낭만적인 취미에서보다 본능적으로, 또한 거의 절대적으로 동트는 새벽녘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10년 동안이나 나와 자녀들의 역사를 담고 있던 옛집을 떠나 새집으로 오던 그 밤부터 가족들의 큰 두통거리가 생겼다.

즉 새로 이사해온 이웃들이 모두가 두 번 세 번씩 밤손님을 치러 값진 가구들을 읽었기 때문에 대소를  막론하고 창마다에 철창을 대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어쩌는 수 없이 오던 그날로 안방과 대청과 서재에는 자바라라고 하는 철문을, 창마다에는 철창을 만들도록 주문하고 그것이 되는 동안은 가족들이 밤마다 잠을 설치며 집을 지켰는데, 철창이야 비교적 간단하게 끝냈지만 널따란 창에  두 쪽으로 철문을  다는 절차는 소란하고 복잡하여서 처음부터 완강히 반대하던 나는 아예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드디어 자정이 되어서 아들이 철문을 닫아주는데, 다이아몬드형으로얽어진 자바라를 양쪽에서 잡아당겨 닫고 거기에다가 터럭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슴이 콱 막혔다. 완전히 감옥에 갇힌 몸이 된 것이다. 불을 끄고 누웠으나 눈 만들면 희미한 불빛에 넓은 창문 전체를 시커멓게 덮은 창살이 보여서 전전반측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 네시가 되어 희끄무레 동이 터오자 나는 퉁기듯 젖 먹던 힘까지 다 들여서야 겨우 양쪽으로 밀치고 유리창 문을 활짝 열었다.




 

 




아아!!  이 상쾌한 대기! 유쾌한 죄수의 해방감! 이렇게도 새벽이 고마울까? 이젠 2주일이나 지났으니 좀 석삭혀지기라도 했으련만 나는 어째서 이렇게 밤마다 갇혀야만  하는 것일까?

뭣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런 불만으로 밤새껏 숙면을 못하다가 새벽만 되면 기계처럼 일어나 자물쇠를 따고 자바라를 밀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