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은은한 이야기

러브 스토리

목련이 필때 2021. 2. 13. 22:04




"학예회 날 보게 된 게 일생의 실수였지.

누가 저런 여편넨 줄 알았었나, 내 팔자가 사나워서 쯧쯧쯧......

 

그런데 서울은 왜 빨리 안 가는 거요. 병이 났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고쳐야지."







시골의 허름한 초가지붕 밑에서나 들려옴직한 이 넋두리는 엉뚱하게도 시체 말로 엘리트 코스만 밝으며 살아오셨다는 소위 지식적인 내 아버지 술주정의 한토막이다.




 




심상찮은 증상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진찰 차 제주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가 버스 간에서 들려준 이 말에 나는 주위도 잊고 허리를 잡으며 깔깔거리고 말았다.




 




학예회 날이란 말을 하실 때와 아버지 표정이 상상되었던 까닭이다.

그 날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음 대면하게 된 날이다. 지금 예순여섯이 되신 아버지는 열두 살 난 소년이었다. 학예회를 구경하고 있는 소년곁을 복상스레 생긴 계집애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잠깐 사이 스쳐 지나가버린 소녀의 영상이 소년의 뇌리에 박혀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행운은 엉뚱한 데서 찾아왔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찾아간 집 툇마루에서 다리를 짤랑짤랑 흔들고 있는 그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소녀를 발치로 지켜보며 어언 2년이 흐르고 소녀가 여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늦게야 입학하여 이제 겨우 5학년이 된 소년은 큰일이었다.




 

 




수로 천리 육로 천리 단신 한양으로 뛰어올라가서 입학 검정고시를 치르고 기어이 제일고보에 입학하는 영예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아버지가 추운 겨울날" 하이네 시집"을 들고 여학생이 된 어머니를 찾아갔더니, 얼굴만 붉힌 채 들어오라느니 고맙다느니 말 한마디 없이 얼른 책만 받고 들어가 버리더라는 얘기.. 서울로 올라오는 배에서 아버지가 건네주신 멀미약을 먹지 않고 종이에 예쁘게 고이 간직해 두었더란 얘기...







지금 젊은이들에겐 바보스럽게 밖에 느껴지지 않을 얘기들과 함께 그들의 사랑은 석류알처럼 빨갛게  영그러 갔다.

 

교사가 되어 장성으로 부임해간 어머니를 찾아 어느 가을날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아버지는 망토 자락 휘날리며 찾아왔었다. 하룻밤을 묵고 가게 된 그날 밤 얘기가 또 희한하다.

 




 




 

 

할머니 승낙을 받고 책상 앞에 마주 앉아 쌓인 회포를 풀게 되었는데, 그렇게 앉은 채로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단다. 손 한번 만져보지 않고서... 않은 게 아니라 못했단다.

 







너무 소중해서 그렇듯 조심스레 자기들의 사랑을 아끼며 키워간 긴 긴 기다림의 세월 끝에 그들은 백년가약의 화촉을 밝히고 우리 다섯 남매를 슬하에 두셨다.

60을 헤아리는 세월을 때로는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시면서 서로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아오고 게시다.




 




 

학예회 날 본 게 일생의 실수였다는 아버지의 팔자타령에서 나는 그분의 먼 옛날의 그리움을 엿본다.




 




그리고 이런 여편넨 줄 알았느냐는  푸념 속에 반세기를 한결같이 고락을 나눠준 아내와의 깊은 신뢰를 들여다보는 것은 자식의 편애 일지, 그렇게 마구잡이로 깎아내리다 말고는 왜 진찰을  하루라도 빨리 올라가지 않느냐고 성화를 대시는, 그리고는 병이라면 집이라도 팔아서 고쳐줘야지 하는 그 한마디는 바로 11년을 손 한번 잡아보지 않고 사랑을  가꾼 아버지다운 수줍은 사랑의 고백이 아닐는지...







어머니가 돌아오신 이튿날로 장거리 전화로 물어오시는 아버지는  갑자기 복상스런  계집애로 되돌아간 듯 응석스레 응답하시는 어머니의 황홀하고도 기쁨에 찬 표정..... 사랑이란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것인가를  뭉클해진 가슴으로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딸인 나도 두 분과 같은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일이다.




 




나쁜 여편네라서 이지만 아버지는 내가 없으면 쓸쓸해 하루도 편치 못하시단다. 서슴지 않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의 확신이 부럽다.




 




 아이들처럼 토라졌다 새침해졌다 하면서 학예회 날의 복상스런 계집애를 , 멀미약을 건네주던 따스한 손길을  서로의 주름진 모습 속에 보며 사는 그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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